Ⅰ. 들어가며
페미니즘은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오히려 친숙하다. 인권 운동이었던 페미니즘 은 영화, 리얼리티 쇼, 티셔츠, 생리대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삶 전반에 침투하고 있다. 그것도 아주 부드럽고 편안한 방식으로 말이다. 남성을 혐오하는 여성들의 전유물처럼 비하되던 페미니즘은 이제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는 무언가로 변모 했다. 미디어 문화는 여기서 큰 역할을 했다. 불과 몇 년 전 페미니즘을 거부하던 팝가수들은 앞 다투어 페미니스트 선언을 하고, 그들의 페미니스트 여부는 세간 의 화제로 떠올랐다. 비단 미국의 상황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유교와 보수주 의로 점철된 한국 아이돌 시장에서도 우리는 그 주제를 어렵지 않게 마주했다. 페미니즘이 대중 문화에 의해 논의되어지는 것은 오래 전부터 페미니스트들이 바라 왔던 현상이며 페미니즘의 비약적 진보였다.
그런데 어딘가 이상하다. 과거와 다를 바 없는 춤을 추는 아이돌들은 가사에서 여성을 언급했다는 이유만으로 ‘페미니스트’로서 찬양 받는다. 60여 년간 여성의 누드 화보를 제작했던 <플레이보이> 잡지는 화보 제작을 중단한다고 하자 친여 성적 행보를 밟는 것처럼 추켜세워진다. 우리는 좀처럼 페미니즘을 기대하지 않 았던 곳에서도 그와 조우하게 되었다. 그러나 페미니즘과 닮아 있는 이 문화 산 물들은 우후죽순으로 쏟아지는 데 반해, 현실의 변화를 일으키지는 못한다. 미디 어 문화라는 망을 통해 걸러진 페미니즘은 매끈한 형태로 묘하게 탈정치화 되어 있기 때문이다. 미디어는 페미니즘을 상업적인 가치가 있는 것으로 가공하여 판 매한다. 그 과정에서 페미니즘은 희석되고 변질되며 본래의 역사성과 정치성을 잃은 채 상품으로 전락한다.
『페미니즘을 팝니다』에서 저자 앤디 자이슬러(Andy Zeisler)는 오늘날 페미니 즘이 처한 이러한 위기의 현실을 꼬집는다. 그리고 마치 불쾌한 골짜기와도 같은 이 페미니즘을 ‘시장 페미니즘’이라고 명명하며1) 페미니즘이 미디어 문화 산업 안에서 이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촘촘히 밝힌다. 책의 원제인 『We Were Feminists Once』(우리는 한 때 페미니스트였다)에서 알 수 있듯, 저자는 동시대 페미니즘 조류에 거리를 두면서 시장 페미니즘의 출현이 쏘아올린 페미니스트 정체성 변화 에 주목한다. 페미니스트 실천이 소비의 영역으로 치환된 만큼 과거의 투쟁은 퇴색되고 있는 지금, 이 책은 시장 페미니즘을 어떻게 수용해야 하는지, 나아가 어떠한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Ⅱ. 페미니즘은 돈이 된다
1부 ‘페미니즘, 시장에 동화되다’는 시장 페미니즘이 탄생한 경로를 짚는다. 저자는 페미니즘이 미디어 문화에서 어떻게 전개되어 왔는지를 시기 별로 정리 해 설명한다. 페미니즘이 시장에 동화되기 시작했던 20세기 초반부터, 최근까지 의 사례들을 검토해보는 작업은 점점 더 교묘해지는 시장 페미니즘의 양상을 효과적으로 인식하게 한다. 되짚어 보면 명백히 성차별적인 맥락임에도 당시에 는 언론과 대중에 의해 칭송 받았다는 사실을 통해 우리가 현재에도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재고하게 한다.
‘페미니즘은 돈이 된다’는 명제는 널리 쓰인다. 틀린 말이라고 치부할 수만은 없다. 20세기 이후 자본주의는 새로운 시장 주체로 여성을 지목했다. 자본주의와 결탁한 페미니즘은 ‘담배가 여성 해방에 필수’라든지, ‘스웨터가 새로운 자유의 표현’이라는 마케팅을 통해 소비가 여성의 권력을 고취시킬 것이라는 생각을 심 어 주었다. 그리고 이러한 발상의 기저에는 선택권 자체를 가지는 것이 가장 중 요한 가치라고 말하는 신자유주의적 이념이 자리했다. 신자유주의는 구조의 문 제를 여성의 선택의 문제로 회귀시킴에도 소외되어 왔던 여성 소비자들은 이러 한 태도를 기꺼이 수용했고, 상업성을 인정받은 시장 페미니즘은 주류 페미니즘 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주류로 등극한 페미니즘은 유행처럼 번져 온갖 곳에 이용된다. 저자는 페미니 즘이 미디어에서 가시화될 때의 문제점을 자세히 비춘다. 그는 ‘페미니즘적’이라 는 말이 영화계에서, 여성이 등장했다는 이유로, 여성이 감독했다는 이유로, 심 지어는 여성이 과거처럼 노골적으로 착취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통용되고 있음을 비판한다. 그리고 이렇게 현실 여성의 권리와 동떨어지는 과장이 넘쳐나는 것은 암묵적인 관행에 따라 무표의(unmarked) 존재였던 남성의 이야기와 달리 여성의 이야기는 특수한 것이었기 때문임을 환기한다. 또한 저자는 연예인들이 몰고 온 ‘페미니즘 유행’은 이를 시간이 지나면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고루한 사조 정도로 여기게 한다고 주장한다. 이미 성평등은 성취되었는데 무슨 논의가 더 필요하냐는 식의 착시현상을 불러일으키면서 말이다. 저자의 이러한 비판은 시 장 페미니즘이 즐거운 논쟁거리를 제공할 때, 현실의 복잡한 문제들은 수면 위에 떠오르지도 못한 채 주변화 되는 핵심을 지적한 대목이었다.
Ⅲ. 달콤한 페미니즘
2부 ‘과거의 잣대’에서 저자는 시장 페미니즘의 영향과 이가 은폐한 미해결 과제들을 다룬다. 페미니즘 담론이 활성화 될수록 그에 대한 역풍(Backlash) 또 한 활성화되는 것은 주기적으로 되풀이 되는 현상이었다. 미디어에서 페미니즘 이 가시화될 때, 사람들은 마치 이가 현 체제의 균형을 금방이라도 무너뜨릴 것 이라 믿었다. 누군가는 이를 칭송했고, 누군가는 이에 대한 불안감과 혐오감으로 페미니즘을 공격하고 그 성취를 평가절하 했다. 여기에는 남성 시선을 내면화 한 포스트 페미니스트 여성으로부터의 공격 또한 포함 되었다. 그리고 언론은 이를 놓치지 않고 여성들 간의 대결 구도로 만들어 자극적으로 소비하였다. 저자 는 이와 같은 현상을 ‘미디어 마약’에 비유한다. 2) 이처럼 미디어 문화는 페미니 즘을 진지하게 다루기보다 사람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가공하여 전시했다. 시장 페미니즘은 따라서, 생산적인 논의를 이끌어내기 보다 도파민을 불러일으키는 자극제처럼 이용되었다.
시장 페미니즘은 정말로 마약과 같이 달콤했다. 저자는 화장품 브랜드 도브의 몸 긍정 캠페인 광고의 예시를 들며 페미니즘의 언어만을 차용한 광고들에 속아 넘어가서는 안 된다고 설파한다. 이 광고는 실제로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고 업계에 진동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는 이가 어디까지나 여성의 외모와 권력을 동일시하는 미용 산업에 봉사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는 또한 “우리는 환 상 속의 권력이 여자들을 안심시키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 환상에 따르면 여성 해방은 기정사실이고, 우리는 더 강해졌”3)다는 수잔 J. 더글러스의 말을 인용하 며 교묘한 시장 페미니즘에 대한 문제의식을 다시 한번 제기한다.
Ⅳ. 나가며
앤디 자이슬러는 책의 맨 앞에 “사랑하는 하비에게, 부디 너희들의 세대에는 이 골치 아픈 문제가 말끔히 해결되기를”이라고 썼다. 이 문장은 아직 페미니즘 이 갈 길은 멀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동시대의 페미니즘은 재미있고 편안하다. 그래서 유혹적이다. 그런데 문제는 페미니즘이 즐거워서는 안 되는 것이다. 페미 니즘이 유효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불편한 것이 맞다. 사회의 변화는 정중하고 듣기 좋은 목소리로는 달성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책은 이러한 입장에서 동시대 페미니즘을 바라보는 방식에 대해 고찰하게 한다. 일상 속에 스며들어 있는 달콤 한 페미니즘이 과연 우리에게 무엇을 약속하는지를 직시하라고 촉구한다.
페미니즘이 더 이상 재미있는 무언가가 되어서는 안 되지만, 저자는 이 현상들 을 재치 있게 풀어 나간다. 그가 몸담고 있는 매거진 『비치』의 기사처럼 많은 내용을 다루고 있음에도 쉽고 흥미롭게 읽힌다. 책을 이루는 것은 미국의 사례로 한정되었다. 이 책이 쓰일 당시의 한국의 맥락과는 미묘한 시차가 존재했지만 그럼에도 지금의 한국에서 이 이야기들은 보편적으로 적용되며 공감할 수 있는 것이 되었다. 이처럼 시장 페미니즘은 여성과 미디어 문화가 있는 곳이면 어디서 든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이 이에 대한 지적은 계속되어져야 한다. 페미 니즘을 페미니즘이라 부르지 못하는 지금, 시장으로부터 페미니즘을 되찾을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