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론
기술과 접속한 동시대 퍼포먼스는 담론에 지각변동을 일으키며 이를 둘러싼 개념들을 새로이 진단할 필요성을 제기하였다. 가상현실이나 증강현실 기술을 활용한 퍼포먼스는 퍼포먼스의 시공간성을 재고하게 하였고, 인공지능이나 로봇 의 도입은 안무자와 퍼포머의 경계를 확장하며 예술가로서 비인간의 행위성과 물질성에 대한 질문을 촉발하였다. 이러한 조류의 범람은 진정한 현전 경험을 주고 생생한 라이브니스를 느끼게 하기에 환원될 수 없는 조건이었던 라이브 환경과 인간 퍼포머라는 무대의 전제를 교란하며 관객들로 하여금 가상의 몸을 가진 퍼포머들과 쉬이 조우하게 하였다. 2012년, 미국 최대 음악 페스티벌 코첼 라(Coachella)는 작고한 래퍼 투팍 샤커(Tupak Shakur)를 홀로그램의 형태로 무 대 위에 부활시켜 화제를 모았다. 국내에서는 2023년 버추얼 보이그룹 플레이브 (PLAVE)가 데뷔하며 음원 스트리밍 서비스와 음악 방송에서 1위를 석권하는 기록을 세운 바 있다. 이처럼 오늘날 가상의 몸을 경유한 퍼포머들은 기술과의 융합이라는 형식적인 실험에 그치기보다 퍼포먼스 현장 매우 가까이에서 침투하 며 정동을 이끌어내고, 실질적인 수요를 만들며, 다수의 관객을 동원하는 양상을 보인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가상 퍼포머 중에서도 하츠네 미쿠(初音ミク)의 사 례에 집중하여 가상 퍼포머가 제공하는 관객 경험에 대해 논의하고자 한다.
하츠네 미쿠는 2007년 일본의 야마하와 크립톤 퓨처 미디어사가 개발하여 발 매한 음성 합성 보컬로이드(Vocaloid)이자 버추얼 아이돌로, 가상 퍼포머의 대표 적인 성공사례로 여겨진다. 2012년 도쿄에서 열린 단독 콘서트에서는 1만명에 이르는 관객을 모으기도 하는 등, 현재까지도 전 세계적인 인기를 이어오고 있 다. 가상 퍼포머 공연의 관람 경험을 탐구하는 데 있어서 하츠네 미쿠의 사례를 선정한 것은 이 사례가 상업적 성공 측면에서 대표성을 띄기도 하지만 그 작동 방식에 있어 타 가상 퍼포머들과는 구별되는 특이점을 가지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했던 투팍의 사례는 실존했던 인물을 가상의 형태로 소환하며 과거 투팍의 형상을 다시 무대에 재현하는 것이었다. 한편, 플레이브의 경우, 인간 퍼포머가 모션캡쳐와 페이셜캡쳐 장비를 활용하여 가상 캐릭터의 페르소나를 직접 연기하 는 것으로, 이 둘의 사례는 가상 퍼포머의 이면에 구체적인 인간 퍼포머의 육체 가 지금, 혹은 과거에라도 실재한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그러나 하츠네 미쿠는 퍼포머라는 설정을 가진 캐릭터이기 이전에 보컬로이드로, 가상악기 소프트웨어 에 캐릭터가 덧입혀져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이가 재현하는 누군가나 이를 연기하는 인간 퍼포머가 부재한다는 점에서 하츠네 미쿠는 또 다른 논의를 필요 로 함을 시사한다.
그리고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츠네 미쿠는 악기이기에 이용자들이 소프 트웨어를 연주해야만 비로소 목소리를 내며 존재할 수 있는 구조를 띈다는 것이 다. 그런데 이러한 특성을 가진 하츠네 미쿠가 공연장에 퍼포머로서 등장할 때, 그 작동 방식은 가상과 현실의 이분법과 전통적으로 상정되어 온 퍼포머와 관객 의 이분법을 재고하게 하며 기계로 이루어진 가상 퍼포머를 관람하는 방식에 대해 다시 떠올리게 만든다. 관객들이 콘서트에서 하츠네 미쿠를 바라보고자 한 다면, 그들은 무엇을 응시하는 것인가? 그들이 환호하는 대상은 누구인가?
이러한 질문들에서 출발한 본 연구는 하츠네 미쿠가 제공하는 퍼포먼스의 관 람 경험을 규명하기 위해 먼저, 퍼포먼스 담론에서 현전(presence)과 동시대 관객 성(spectatorship)개념을 둘러싼 논의들에 대해 조사한다. 현전 담론을 검토하는 것은 물리적 실재가 부재한 가상 퍼포머인 하츠네 미쿠가 생동감과 실재감을 일으키며 관객과 관계 맺는 방식을 이해하는 데 있어 매우 핵심적인 단계이며 동시대 관객성에 대해 파악하는 것은 객석에 위치한 전통적 관람자로만 설명될 수 없는 하츠네 미쿠의 관객 경험을 규명하는 데 있어서 유의미할 것이라 본다. 다음으로는, 문화적 맥락 측면에서 하츠네 미쿠의 주요한 관객인 오타쿠(オタク) 가 커뮤니티를 통해 어떻게 집단적 참여를 하는지 팬덤 문화와 비교하며 설명하 고, 이러한 참여가 어떠한 관람자 문화와 경험을 만들어 내는지 살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오타쿠 문화 중에서도 보컬로이드와 그 오타쿠 참여 문화에 대해 자세히 설명한다. 이러한 연구 설계는 가상 아이돌이자 보컬로이드로서 일본의 특수한 서브컬처의 지형에 위치한 하츠네 미쿠의 관객에 대해 이해하고 그들이 어떠한 관람 경험을 가지게 되는지에 대해 해명하는 데 매우 유효할 것이다.
또한 이러한 오타쿠의 개입이 전통적으로 무대를 기점으로 명징하게 나뉘어 져 있던 퍼포머와 관객, 근대 합리주의 철학과 이성을 통해 분리되었던 인간과 기계, 사물의 관계를 교란하고 있음을 규명한다는 점에서 이와 같은 논의는 하츠 네 미쿠가 주는 관람 경험을 고찰하는 데 있어 선행연구들과 차별화되는 지점이 다. 서구 중심의 가상과 현실, 기계와 인간, 퍼포머와 관객의 이분법적 시각에서 는 이질적이거나 기괴하다고 여겨지는 문화의 바탕에 존재하는 맥락을 조사하여 밝힘으로써 그 이분법 자체를 재검토하는 데 기여할 것이라 판단한다. 그리고 이러한 구조를 통해 마지막 장에서는 하츠네 미쿠가 이러한 맥락 속에서 어떻게 수용되고 관람되는 지를 이해하며 이가 제공하는 관객 경험에 대해 최종적으로 통찰하고자 한다.
국내에서 하츠네 미쿠를 대상으로 한 연구는 김도희(2018), 조은하(2017), 두 효미, 양종훈(2021), 최주호(2025) 에 의해 진행된 바 있으나, 이와 같은 연구들 은 하츠네 미쿠의 산업적 중요성이나 성공요인, 비즈니스 모델, 소비 행태 등을 분석하여 이를 퍼포먼스 맥락에서는 논의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본 연구와는 방 향성을 달리한다. 한편, 김영아(2020)는 “무대 위의 또 다른 배우 연구-인형에서 가상의 배우까지-”에서 하츠네 미쿠를 가상의 배우로서 논의하였다. 그러나 해 당 연구는 퍼포머로서 하츠네 미쿠에 대해 사유하고자 하였다는 점에서는 의의 를 가지나, 이가 관객과의 네트워크에서 어떠한 관람 경험을 주는지 까지는 나아 가지 못하였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하츠네 미쿠가 무대 위에서 관객에게 어떻 게 정동을 일으키며 작동하는지 또한 살피고자 한다.
한편 국외에서도 하츠네 미쿠에 대한 연구를 찾을 수 있었다. 음악학자 루이 스 잭슨(Louise Jackson)과 마이크 다인스(Mike Dines)(2016)는 “Vocaloids and Japanese Virtual Vocal Performance: The Cultural Heritage and Technological Futures of Vocal Puppetry”에서 하츠네 미쿠를 일본 전통 인형극 분라쿠와 비교하 여 설명하였다. 그리고 음악학자 레이팔 자보로우스키(Rafal Zaborowski)(2016)는 “Hatsune Miku and Japanese Virtual Idols”에서 일본의 아이돌 산업 시스템과 하츠네 미쿠를 병치하여 논의한 바 있다. 이러한 연구들은 일본의 문화적인 맥락 에 하츠네 미쿠를 위치시켜 그 현상을 파악하고자 하였다는 점에서는 본 연구와 매우 유사하나, 본 연구는 이에 나아가 이러한 맥락을 배경으로 두고 공연이 실 제로 이루어질 때, 어떠한 관객 경험을 발생시키는지까지 해명하고자 한다는 점 에서 차별점을 지닌다 하겠다.
Ⅱ. 하츠네 미쿠를 둘러싼 퍼포먼스 담론
1. 본질에서 관계성으로 변화하는 현전(presence) 개념
하츠네 미쿠는 보컬로이드이자 가상 캐릭터이기에 물리적 실재가 부재함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에게 강렬한 몰입과 참여를 불러 일으키고 있다. 따라서 이제는 하츠네 미쿠와 같은 가상 퍼포머가 퍼포머로서 무대 위에 존재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넘어 이가 어떻게 실재하는 것처럼 경험되며 관객과 관계를 형성하 는가라는 질문에 답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 퍼포먼스 담론에서 현전 개념을 중심으로 가상 환경에서의 퍼포먼스나 가상 퍼포머가 어 떻게 다루어져 왔는지 검토하였다.
퍼포먼스 학자 가브리엘라 지아나치(Gabriella Giannachi)와 닉 케이(Nick Kaye) (2011)는 “현전 수행하기: 라이브에서 시뮬레이션까지(Performing Presence: Between the Live and the simulated), 2011”에서 퍼포먼스에서 현전의 개념에 대해 다층 적으로 성찰한 바 있다. 그들은 현전이란 물리적으로 현존하는 퍼포머의 신체에 서 드러나는 본질적 속성이 아니라 현전의 기호가 공연되고, 그 기호에 관객이 반응함으로써 발생하는 현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본다. 즉, 현전은 기호에 의해 구성되고 매개되는 것으로 있는 관객은 있는 그대로의 온전한 현전은 경험 할 수 없고, 항상 어떠한 재현과 기호적 작용이 경유된 형태의 현전만을 경험할 수 있다. 따라서, 현전은 본질적으로 의미를 지연, 차연하는 기호처럼 부재 (absence)를 안고 있는 것이 된다(ibid., 13). 이는 인간의 신체와 신체가 가진 물질성과 현재성을 중시했던 에리카 피셔-리히테와 같은 이들이 매개된 퍼포먼 스는 진정한 현전이 아닌 현전 효과만을 발생시킨다고 했던 주장들에 반박하며, 절대적인 현전은 불가하며 현전이란 수행되고 경험되는 것이라는 시각을 제시한 다. 에리카 피셔-리히테의 논리에 따르면 하츠네 미쿠의 퍼포먼스는 인간 신체를 가지지 못하기에 그 물질성에서 나오는 생생함을 전달할 수 없고, 관객과 콘서트 장이라는 시공간을 공유할지라도 그 신체는 홀로그램을 통해 매개되어 현전 효 과만을 발생시킬 뿐 온전한 현전 경험은 성립될 수 없다. 그러나 지아나치와 케 이의 논리에 따르면 현전 역시 지금, 여기에 완전히 ‘있는’ 것이 아니며 매개되는 것이기에 하츠네 미쿠 퍼포먼스의 현전 경험 또한 재고될 것이다.
지아나치와 케이와 유사하게 무용학자 한석진(2024) 또한 현전을 물리적으로 지금 현재 실재함을 뜻하기보다 관객에게 있어서 질적으로 생생하게 경험되는 것이 강조하는 개념으로 본다(한석진, 2024, p. 120). 한석진은 스티브 딕슨 (Steve Dixon)과 아멜리아 존스(Amelia Jones)의 사유를 견인하며 퍼포머의 물리 적인 신체나, 그것을 전제하는 현재라는 시간성이 언제나 현전의 경험을 담보하 지 않는다고 주장한다(ibid., p. 127). 따라서 비디오 퍼포먼스는 그 자체로 라이 브니스나 현전 경험이 결핍된 파생물이 아니며 가상현실 퍼포먼스는 실재와 반 대로서 허구적 경험으로 폄하되지 않는다는 것이다(ibid., p. 128). 한석진은 사진 과 영화가 실제 세계를 재현할 때 장치를 인식하지 못하도록 비매개성을 강조한 다면, 비디오댄스는 물리적 원리에서는 포착될 수 없는 부분을 의도적으로 노출 하며 비매개성과 하이퍼매개성을 상호적으로 작동시킨다고 말한다. 즉, 사진과 영화 영상이 사실주의적 접근을 통해 실제 세계를 생생하게 전달하는 데 중점을 둔다면, 비디오댄스는 이러한 관습을 의도적으로 파기하며 전복하고자 한다. 무 대 위 물리적 신체의 부재나 시공간적 공동 현존의 불가능성으로 인해 라이브 퍼포먼스의 부차적 위치로 치부 되었던 비디오 댄스는 실제 세계를 사실적으로 재현하기보다 카메라의 연출이나 편집을 통하여 선형적 시간이나 공간을 뒤틀며 라이브 퍼포먼스와는 전혀 다른 관객 경험을 가능케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 편, 가상현실은 관객의 몰입 경험을 위해서 투명성의 비매개를 극대화하는 매체 적 특징을 가진다(ibid., p. 122). 그러나, 가상현실이라는 매체에 춤이 더해진 <휘스트> 사례의 경우, 일반적인 비매개 방식이 아닌 하이퍼매개의 방식을 취해, 관객들이 미디어의 존재를 인식하게 함으로써 오히려 적극적인 해석과 무의식적 으로 서사를 구성하게하는 통제자이자 상호작용자의 역할을 수행하게 하여 현전 경험을 이끌어낸다고 분석한다(ibid., p. 127). 그리고 이와 같은 작품 사례에서 무용수와 관객은 물리적으로 공동 현존하지 않지만, 연출과 서사를 통해 관객은 가상세계와 상호작용하게 되어 현전 경험을 하게 된다고 말한다. 즉, 이와 같은 해석은 퍼포먼스에서 현전 경험의 핵심은 퍼포머의 신체나 그것의 바탕이 되는 현재성이라기보다 관객과 작품의 관계성을 통해 만들어진다는 것을 시사한다.
한석진이 관객과 가상세계, 작품 자체와의 관계성을 강조했다면 케이와 지아 나치는 “현전의 행위: 퍼포먼스, 매개, 가상현실 (Acts of Presence: Performance, Mediation, Virtual Reality)” 에서 CAVE라는 가상현실 프로젝트에서 가상 퍼포 머의 현전에 대해 집중적으로 논의한다. 그들은 불쾌한 골짜기 이론을 들어, 가 상 에이전트 퍼포머가 인간과 너무 비슷해질 수록 사람들의 현전감이 급격히 저하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들은 의도적으로 시나리오에 만화적이고 의도적 으로 허구적인 연출을 포함시켜 구성한다고 설명한다.(Kaye & Giannachi, 2011, p. 90) 나아가, 연극과 퍼포먼스의 맥락에서는 이러한 환영성과 이탈의 감각 자 체가 바로 현전을 생성하는 동력이 된다고 하며, 명백히 가상적인 행위와 몸이 오히려 강력한 현전의 경험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뿐만 아니라, 가 상 퍼포머의 버전에 따라 관객의 현전 경험을 탐색한 실험에서는 가상과 현실이 명확히 대조되며 교차될 때, 그리고 상호작용 시 이가 가상임을 드러낼 때 현전 반응이 증폭 된다고 말한다(ibid., 93). 즉, 가상 퍼포머가 살아 있는 느낌을 주는 것은 인간을 실제처럼 생생하게 모사해서가 아니라 가상과 현실의 경계에서 오 히려 스스로 가상성을 강조했을 때인 것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가상적이고 비물 리적인 퍼포머는 현실적이고 감각적인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는 존재이며 이 과정은 기술적 효과의 구현을 통해 발생하는 것이라기보다 관객과 퍼포머의 상 호작용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라 볼 수 있다.
퍼포머와 관객 간의 상호작용과 더불어 퍼포먼스 학자 켈시 제이콥슨(Kelsey Jacobson)은 관객과 관객 간의 상호작용을 조망하고자 한다. 제이콥슨이 다룬 <리한나보이95 (Rihannaboi95)>라는 온라인 연극 퍼포먼스에서 관객은 공연을 시청하며 채팅으로 참여하는 현실 세계와 가상의 인물이 등장하는 허구적 서계 를 동시에 경험한다(Kelsey Jacobson, 2022, p. 193). 이 때, 이 두 이질적인 세계 의 병존은 케이와 지아나치가 논의했던 것처럼 지각의 경계를 교란시키며 현전 경험을 발생시킨다. 작품의 채팅방은 관객들이 공연 전후와 중에도 서로 그리고 퍼포머와도 익명으로 대화할 수 있도록 허용되는데, 관객들과 퍼포머는 라이브 퍼포먼스에서처럼 물리적으로 공동 현존할 수는 없으나 가상의 환경에서 연결되 어 존재한다. 그리고 그는 이를 가상 공동 현존(virtual co-presence)라 이르며, 이가 감각적이고 현상학적이고 정동적인 경험으로서, 관객과 퍼포머 간, 그리고 관객들 간에 깊은 관계성을 낳는 기능을 한다고 주장한다(Kelsey Jacobson, 2022, p. 196). 관객들은 이 과정에서 채팅을 통해 감정과 반응을 공유하고 비교하며 커뮤니티적 관계성을 형성하고, 온라인 퍼포먼스의 특성 상, 관객들은 익명성을 띄게 되는데, 이러한 특성이 관객들 간의 더 높은 친밀감을 만들어 내며 차별화 된 관객 경험을 가능케 했다(ibid., 199). 이를 통해 현전 경험은 관객과 관객 사이 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또한 일어난다는 사실과, 커뮤니티적 관계성의 형성, 온라 인 환경에서의 익명성이나 관객들 간의 친밀감은 관객 경험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침을 이해할 수 있다.
앞선 논의들을 종합하자면, 현전은 신체나 행위 안에 고정된 본질적 속성이 아니라, 수행되고 생성되는 것이다. 따라서 현전 경험은 신체나 현재성에 필연적 으로 동반되지 않기에 신체적 공동 현존은 현전 경험의 한 요소일 뿐으로, 이를 퍼포먼스의 존재론적 본질로 볼 것이 아니라, 그것이 수반하는 결과들과 효과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결국 현전 경험에서 중요한 것은 관객과의 관계성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여기서 관계성이란, 관객들이 퍼포먼스 자체, 퍼포머, 그리고 관 객들 간에 맺는 것으로 현전은 그 속에서 어떻게 감각, 지각적으로 경험되는가에 방점이 찍힌다. 따라서 다음 챕터에서는 관객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퍼포먼스, 퍼포머, 관객과 관계를 맺는지, 퍼포먼스 담론에서 동시대 관객성 개념의 논의를 중심으로 탐색해 보고자 한다.
2. 참여와 공동체를 통해 확장되는 관객성(spectatorship)
퍼포먼스에서 관객은 무대와 객석을 분할하는 이원론적 논리에 따라 오랜 시 간 수동적 관람자로 존재해 왔다. 안무가의 의도나 저자의 텍스트가 작품의 의미 를 결정하면 관객은 객석에서 이를 응시하고 수용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람 방식 이자 관객의 역할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연극에서 네오아방가르드 흐름과 무용 에서의 포스트모던의 움직임이 나타나자 관객은 객석으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했 으며 그 역할은 확대되어 왔다. 그리고 디지털 기술과 미디어 환경이 끊임없이 접속하는 동시대 퍼포먼스에서 관객성은 점점 더 관극과 응시가 아니라 실천과 참여의 방식으로 변화하고 있다. 기술의 산물이자 관객들의 참여를 통해 서사와 목소리, 움직임이 부여되는 하츠네 미쿠의 관객 경험을 탐구하기 위해서 이번 장에서는 동시대 퍼포먼스 담론에서 드러난 관객성에 대해 조사하였다.
퍼포먼스 학자 윌리엄 르위스(William W. Lewis)는 “’포스트휴먼’ 관객성 수 행하기 (Performing ‘Posthuman’ Spectatorship)” (2017)에서 몰입, 참여, 게임 플 레이라는 쟁점을 통해 동시대 퍼포먼스에 드러난 관객성을 살핀다. 르위스는 인 간과 기술이 함께 공진화한다는 관점에서 기술의 영향을 받는 동시대 관객성은 포스트휴먼 관객성으로, 다양한 기술들은 관객의 지각 체계를 증강시키며 새로 운 형태의 관객성을 가능케 한다고 설명한다 Lewis, 2017, p. 7). 그 중에서, 몰입 은 관객을 퍼포먼스 속 허구의 세계관 안에 머물며 감정적 소속감과 행위주체성 을 느끼게 하고, 르위스는 이러한 행위주체성이 몰입 경험의 핵심 요소라고 주장 한다(ibid., p. 8). 또한, 르위스는 관객의 참여에 대해서도 강조한다. 그런데 동시 대 퍼포먼스 담론에서는 관객의 참여가 반드시 행위주체성과 자유를 보장하지 않으며, 그들에게 권한이 주어진 듯 보이나 실상은 매우 제한된 선택권만이 주어 지기에 오히려 신자유주의적이라는 점을 지적하는 시각들도 보인다(Alston, 2013; Kolb, 2013;Santone, 2014)..
그러나 르위스는 이러한 참여가 최종 결말을 무조건 바꿀 수 있는 형태로 작 동하지는 않지만, 퍼포먼스의 서사와 세계관에 균열을 일으키는 순간들을 유발 하기에 관객이 소비적 선택의 환상을 넘어, 서사나 사건을 실제로 변화시키며 개입할 수 있도록 한다고 말한다(Lewis, p. 8). 그리고 게임 플레이의 쟁점의 경 우, 관객은 정해진 규칙 안에서 자기비판적으로 몰입하고 참여하기 때문에 가장 높은 수준의 행위주체성과 자기결정성을 가질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한다(ibid., p. 8). 놀이라는 장치는 관객으로 하여금 퍼포먼스를 즐기는 경험에 그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게 하고, 그 행동은 이야기 전개와 같은 결과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즉각적인 반응이나 감정을 통해 참여하기보다 책임 이 있는 판단과 행동을 요구하게 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르위스는 디지털 미디어와 결속한 포스트 휴먼 관객은 체험자 (experiencer)로 이해된다고 설명하는데(ibid., 8), 이는 이머시브 연극의 관객성에 대해 논의한 퍼포먼스 학자 케렌 자이온츠(Keren Ziontz) 또한 언급한 개념이다 (Ziontz, 2014, p. 408). 여기서 체험자는 이머시브 환경에서 감각적으로 몰입하 며 경험하는 존재로서 관찰자가 아니라 몸으로 직접 체험하는 주체로 이해된다. 케렌 자이온츠는 이러한 체험자라는 위치가 공동체성을 만들기보다 오히려 관객 의 개인적 자기 몰두(self-preoccupation)를 유도한다고 설명한다(ibid., p. 408). 즉, 관객들이 이머시브 퍼포먼스를 경험한 후 소셜 미디어 네트워크 서비스 등을 통해 자신들의 참여 경험을 공유하고 비교하는데 자이온츠는 이가 사회적, 협동 적인 상호작용을 위한 것이 아니라 개인의 소비 방식을 정교화하는 데 이용된다 는 것이다. 반면, 르위스는 이러한 체험자적 위치가 공동체적 감각을 형성한다는 것을 강조한다(op. cit., p. 8). 르위스의 관점에서 VR과 같은 기술은 1인칭 시점 이기에 독립적이라고 여겨지기 쉽지만 관객과 기술, 공간, 다른 관객들과의 새로 운 공동체적 감각을 형성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해석은, 자이온츠가 관 객들이 네트워크적 상호작용을 통해 공동체성을 이루는 것처럼 보이나 개인 스 스로에게 몰두하고자 한다고 분석한 것과 대비되게 기술의 발달이 관객의 독립 성과 초개인화된 영역을 발생시킴과 동시에 또 다른 공동체성과 상호작용의 네 트워크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시각을 제시한다.
퍼포먼스 학자 줄리아 리터(Julia M. Ritter)는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관객의 팬덤 경험에 대해 논의한다. 리터는 <슬립 노 모어 (Sleep no more)>의 사례에 서 다른 연구에서 이머시브 연극들이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관객들이 네트워 크를 이루어 경험을 나누고 공유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여기서 더 나아가, 리터 는 관객들의 팬 블로그나 커뮤니티 활동과 같은 팬덤 활동에 대해 묘사하며, 이 러한 과정을 확장된 관객 참여(extended audiencing)라고 일컫는다(Ritter, 2017, p. 66). 그가 묘사한 한 관객은 이 공연을 80여 회 관람하였고, 이와 관련한 사진, 미디어, 비평, 팬아트, 댓글을 리블로그하며 스포일러 없는 팁을 제공하여 다른 팬 관객들과 커뮤니티와 네트워크를 이루어 왔다고 한다(ibid., p. 67). 그리고 또 다른 관객은 작품의 안무에 영감을 받은 디지털 드로잉한 팬아트를 그리거나, 자신의 관람 경험을 담은 만화를 그리기도 한다(ibid., p. 71). 이러한 팬덤 활동은 관람 행위와 관객 참여를 퍼포먼스 전후를 아우르는 실천으로 확장시킴으로써, 퍼포먼스를 이해하고 즐기는 또 다른 방식을 제시할 뿐 아니라, 공동체적 네트워 크를 가능케 하며, 그 자체로 담론과 실천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이는 하츠네 미쿠의 관객 경험에서도 드러나는 측면으로, 하츠네 미쿠의 사례에서는 관객인 팬덤의 이러한 활동 자체가 퍼포머의 서사와 이야기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그러나 하츠네 미쿠 이외에도 관객이 직접 퍼포머의 서사나 역할을 조작하는 사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곤살로 프라스카(Gonzalo Frasca)는 아우구스토 보 알(Augusto Boal)이 제안한 억압 받는 사람들의 연극’ 개념을 디지털 게임으로 전환하고, ‘억압받는 자들의 비디오게임’이라는 개념을 고안하며 디지털 게임 안에서 플레이어를 관객-배우로서 본다(곤살로 프라스카, 김겸섭 역, 2008). 그리 고 프라스카는 게임 안에서 몰입의 메커니즘과 규칙들이 현실의 이데올로기적 모순들을 이상화된 모습으로 그려내거나, 은연 중에 주입하고 있다는 것을 억압 으로 보고 비판하면서 관객-배우인 플레이어가 게임의 행동 규칙을 스스로 변경 할 수 있는 모드 게임(mod game)을 구상한다. 이는 원작 게임들을 변형하여 다 양한 파생 게임을 관객-배우가 직접 생성하는 것으로, 보알이 관객에게 연극의 규칙을 재고하도록 했던 것처럼, 프라스카는 게임의 규칙을 의심하게 하며 관객- 배우를 창작 과정에 초대한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창작된 파생 게임들은 역으로 게임사에 구매되어 다시 시장에 출시되기도 한다(김겸섭, 2010, p. 23). 즉, 관객- 배우는 자신의 세계를 표현하며 퍼포먼스에 참여하는 동시에, 창작자로서 자신 이 창작한 퍼포먼스를 다른 관객-배우에게도 공유할 기회를 얻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참여는 모두 적극적인 자발성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의미를 가진 다(ibid., p. 24). 이 사례와 같은 구조는 하츠네 미쿠의 관객성과도 상당 부분 공명한다. 그러나 모드 게임이 원작 게임을 변형하여 파생시켰던 반면 하츠네 미쿠의 경우에는 2차 창작이 이루어지기 이전 1차 창작에서부터 관객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상이하며, 이는 관객 경험에 분명한 차이를 일으킬 것이라 본다. 따라서 이러한 관람 방식의 바탕에 어떠한 문화적 맥락이 작동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다음 장에서는 일본 서브컬처의 맥락에서 하츠네 미쿠의 주요한 관객이자 팬덤인 오타쿠와 그 관람 방식에 대해 자세히 다뤄보도록 하겠다.
Ⅲ. 하츠네 미쿠를 둘러싼 문화적 맥락
1. 오타쿠(オタク) 문화와 그 향유 방식
가상의 캐릭터이자 보컬로이드인 하츠네 미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타쿠 문화에 대해 논의할 필요가 있다. 오타쿠는 단순히 서브컬처 문화 산물의 시청 자나 관람자, 팬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승재(2016)에 따르면 오타쿠는 팬, 마니 아와 구분되며 대체로 그들보다 한 단계 위에 있을 법한 사람들을 의미한다. 무 엇을 애호한다는 점에서 오타쿠는 팬이나 마니아와 유사하지만 관련 지식이 일 반적으로 해박한 수준을 넘어 비평적인 시각까지 견지한다는 점에서 나머지와 구별된다.
애니메이션 평론가 오카다 토시오(岡田斗司夫)는 오타쿠에 대해 20세기에 태 어난 새 부류의 인종이며 고도의 백과사전적 능력을 가진 인간이자. 관련된 여러 분야를 넘나들며 말하고, 즐기고, 질리지 않는 향상심과 자기 과시 욕구로 정진 하며 많은 돈과 시간을 투자할 수 있는 사람이라 정의한 바 있다(오카다 토시오, 2000, 재인용, 조홍미 & 이병곤, 2012, p. 4). 이처럼 오타쿠의 특이점은 시청이 나 관람에 나아가 보다 더 적극적인 연구자의 자세로 애니메이션과 같은 서브컬 처를 대한다는 데 있다.
그러나 사회적인 맥락 안에서 오타쿠가 코딩되는 방식은 이와 같은 지식 수준 이나 열정도에만 입각하지 않는다. 자신이 애호하는 한가지만 탐닉하는 오타쿠 의 특성은 자신의 정열과 흥미를 충족시켜주는 것들로 가득한 집에 칩거하는 것으로 나타난다(에티엔 바랄, 2002, p. 30). 이처럼 그들이 집에 칩거하며 폐쇄 적으로 인간관계를 맺는 방식과 사회성이 결여된 모습은 오타쿠에게 제거하기 어려운 부정적인 이미지를 씌우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부정적 이미지의 원천은 그들이 인간관계를 맺는 방식뿐 아니라, 사물이나 기계와 관계 맺는 방식으로까 지 확장된다.
오타쿠들은 컴퓨터, 만화책, 첨단 기술 제품들의 중개를 통해 소통하지만 정작 주변의 가족과 친구는 소홀히 한다(이승재, 2016, p. 5). 즉, 이는 오타쿠가 인간 과의 관계보다 애니메이션이나 만화책 같은 매체와 더 깊이 교감하는 방식이 보편의 시각에서는 거부감을 유발한다는 점을 암시한다. 다시 말해, 이러한 오타 쿠를 향한 거부감은 단순히 인간과의 소통이 불가하다는 측면뿐 아니라 사물과 소통하고자 함에 또 한 번 방점이 찍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은 근대 합리주 의와 이성이라는 체계 안에서 사물이나 기계와 완벽히 분리된 성역에 존재해왔 기에, 이와 같은 뿌리 깊은 인식으로부터 그것들과 교감하고자 하는 오타쿠에 대한 거부감은 한편으로 자명한 것이다.
정신의학과 의사인 사이토 다마키(斉藤環)는 오타쿠를 허구적 컨텐츠에 친화 성이 높은 사람, 사랑하는 대상을 소유하기 위해 허구화라는 수단을 이용하는 사람, 이중적 구조가 아닌 다중적 구조로 사물을 인식하고 허구 그 자체에서 성 적인 것을 끄집어 낼 수 있는 사람, 또는 이 중 하나라도 해당되는 사람이라 일컬었다(斉藤環, 2010, 재인용, 조홍미 & 이병곤, 2012, p. 4). 다시 말해, 오타쿠 는 허구, 가상이나 사물에 흥미를 품고 교감하는 것에 나아가 성애적 감정을 품 을 수 있는 이들이다. 2018년 하츠네 미쿠와 결혼한 남성이 등장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이성의 기준에서는 납득하기 어려운 그들은 이미 보편의 현 실을 스스로 도외시하며 자신들만의 가상 현실에 사는 것이다. 긍정적이든 부정 적이든, 오타쿠는 가상과 현실, 사물과 인간이라는 이분법에서 합리성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의 항에 기꺼이 접촉하고, 결국은 그 이분법에 구멍을 내는 존재들이라 읽어낼 수 있다. 이승재(2016)에 의하면, 첨단 기술에 익숙한 오타쿠 들은 “환상과 인공 세계의 관조 속으로, 또는 과도하게 미디어화된 심연의 세계 속으로 빠져들면서” 사회를 다른 시각에서 보도록 제안한다. 또한 “초미디어화 된 첨단 기술이 널려 있는 광활한 벌판에” 사는 “가상 국가의 일등 시민”으로서 소프트웨어 혁명이 낳은 새로운 세계를 선도하며 살아나가는 개체인 것이다.
이러한 특징을 가진 오타쿠의 문화 향유 방식은 일방적인 수용과 관람에 그치 지 않는다. 대신에 그들은 원본을 패러디하며 또 다른 이야기를 창작해내는 적극 적인 생산자의 위치를 점한다. 이러한 활동을 비평가인 아즈마 히로키(東浩紀)는 2차 창작(2次創作)이라고 명명하며, “오타쿠 문화의 중핵”이라고 언급했다(아 즈마 히로키, 2007, p. 55). 2차 창작물의 종류는 다양한데, 이는 애니메이션이나 만화에 등장하는 캐릭터의 팬아트, 혹은 이를 주인공으로 한 또 다른 만화나, 소설이 되기도 한다. 이와 같이 2차 창작은 원작의 요소들을 선택하고 차용하여 또 다른 창작물을 만들어 내는 것이며, 애호하는 작품을 자신의 것으로 온전히 체화하고, 캐릭터에 대한 거대한 애정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방식이다. 이 과정 에서 자신만의 해석과 재구성이 개입되기에, 2차 창작은 의미를 능동적으로 생 산하고 조작하는 관람 방식을 전제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러한 관람 방식은 자신들의 몸을 통해 캐릭터를 직접 재현하는 코스프레 (cosplay)의 형태로도 나타난다. 코스프레는 문화콘텐츠의 캐릭터나, 다양한 인 물이 하고 있는 의상을 만들어 입고, 스스로에게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하는 행위 (윤은호, 2012, p. 253)로, 캐릭터의 자아 정체성을 몸소 수행한다는 점에서 다른 2차 창작과 구별된다. 코스프레는 일반적으로 축제나 행사에서 이루어지며, 참 여자들은 공공성을 띄는 무대적 공간에서 캐릭터 되기를 수행한다. 이는 공통의 관심사를 공유하는 타인들과의 역할놀이를 통해 그 정체성을 체현하는 과정이자 재현한 캐릭터와 정체성과 삶을 공유함으로써, 가상 캐릭터 자체와도 깊이 있게 소통하고 관계 맺는 경험이 된다. 이는 다른 2차 창작과 마찬가지로 적극적인 참여를 통해 콘텐츠의 저자와 관람자의 역할을 뒤흔드는 것임과 동시에 몸을 통해 가상의 인물들을 현실의 공간에 견인해 옴으로써 단절되어 있던 가상과 현실에 가교를 놓는 행위로 이해할 수 있다.
2. 커뮤니티로서 오타쿠 문화의 집단적 참여와 모에(萌え)
오타쿠들의 문화 향유 방식에서 또 다른 가장 중요한 특징은 이들이 개인적 소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커뮤니티를 이루어 활동한다는 것이다. 즉, 오타쿠가 지향하는 것은 가상의 인물이나, 허구의 존재들, 나아가 인간 아이돌과의 소통뿐 아니라, 같은 관심사를 가진 동질 집단과의 소통이다. 오타쿠들은 서브컬처의 2차 창작과도 같은 애호 활동을 서로 공유하거나 이에 관한 토론, 비판을 통해 하나의 장을 만들며 활동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인간보다는 기계나 사물과 상호 작용하는 것에 더욱 친숙한 오타쿠들의 커뮤니티는 주로 오프라인 환경이 아닌 온라인을 기반으로 발생하며, 인터넷이라는 매개는 오타쿠들에게 시공간의 제약 없이 자신이 원하는 시간대에 자신이 원하는 것만 볼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였 다. 이러한 환경은 자신이 열광하는 무언가에만 천착하고자 하는 오타쿠들에게 는 더할 나위 없는 공간이었고, 네트워크만 연결되면 발언권을 지니게 되는 온라 인상에서는 사회의 비주류였기에 가시화될 수 없었던 그들의 취향은 영향력을 지니게 되며 커뮤니티를 형성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러한 오타쿠 커뮤니티의 성격은 팬덤 문화와도 공명하는데, 팬덤 문화 또한 오타쿠 커뮤니티와 마찬가지 로 온라인 환경 조성과 디지털 미디어의 다양화로 인해 더욱 강화되어 왔기 때문 이다(유지연, 2020, p. 88).
뿐만 아니라, 팬덤과 참여문화 이론에 대해 논의한 헨리 젠킨스(Henry Jenkins) 에 따르면 팬덤의 참여문화는 소속(affiliation), 표현(expression), 집단적 문제해 결(collaborative problem-solving), 순환(circulation)의 개념을 중심에 두고 있다 (헨리 젠킨스, 김동신 역, 2008). 여기서 소속은 팬덤 커뮤니티에 소속되는 것을 의미하고, 표현은 2차 창작물을 생산하는 것을 지칭하며, 집단적 문제해결은 새 로운 지식을 발전시키거나 서사를 만들어나가는 등의 집단 작업을 이른다. 마지 막으로 순환은 이러한 과정을 다양한 통로로 배포하는 작업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개념들을 핵심으로 하는 팬덤의 참여문화에서 가장 강조되는 것은 커뮤 니티의 적극적 참여가 개인적 행동이 아니라 집단적 표현의 수준에서 이루어진 다는 것이다(황시이, 권호창, 2023, p. 92). 또한 그 집단 내에서 참여 주체 간의 지속적인 교류와 상호작용을 통한 감정적 공감대 형성이 문화를 지속하고 발전 시키는 데 필수적이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양태는 오타쿠 문화에서도 동일하게 관찰되는 것으로, 오타쿠는 커뮤니티 내부에서의 교류와 또 다른 오타쿠들과의 관계 맺기를 통해 동질감과 연대감을 중시하며 그 커뮤니티에 소속되기를 추구한다.(황선환, 김종호, 2015, p. 75) 또한, 2차 창작물을 적극적으로 생산함으로써 자신들의 취향을 표현하고, 집단적으로 새로운 서사나 세계관을 추가하고 배포하기도 한다. 그리고 여기서 눈여겨볼 만한 지점은 오타쿠들이 개인의 취향을 표현하는 것은 자기만족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타 오타쿠들의 인정을 받기를 기대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이러한 취향의 공유와 교류 과정에서 개인의 표현은 집단적 공간으로 진입하게 되며, 표현의 과정에서부터 이미 오타쿠 커뮤니티의 집단적 개입을 상정하는 것 이다. 이러한 오타쿠 문화는 개인이 아닌 집단에 방점에 찍힌다는 점에서 팬덤 문화의 양상과 상당히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일본의 서브컬처의 맥락에 서 오타쿠의 향유 방식이 팬덤의 향유 방식과 뚜렷이 구별되는 한 가지 특징은 오타쿠의 문화 향유에는 데이터 베이스 소비와 모에(萌え)적 소비가 기반하 고 있다는 사실이다(아즈마 히로키, 이은미 역, 2007, pp. 90-115).
모에는 그 용례가 다양하여 한가지로 번역할 수는 없으나, 일반적으로 일본 대중문화에서 애정이나 호감과 유사한 의미로 쓰이는 표현이다(명관도, 김경희, 2017, p. 457). 아즈마 히로키는 이러한 모에적 소비를 데이터 베이스 소비라 일컬었는데, 이는 오타쿠는 캐릭터의 외형이나, 성격, 역할과 같은 속성들을 데 이터 베이스처럼 유형화 시켜 소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오타쿠가 즐기는 서브컬처에서 캐릭터들은 그 캐릭터만의 고유한 속성을 가지기보다는 미리 데이터베이스에 등록된 요소들을 조합하여 출력한 결과이다. 그리고 이렇 게 출력된 결과는 어떤 유형이든 오타쿠들 간의 약속에 부합하는 존재이기만 하면 오타쿠들은 감동하며 애정을 품을 준비가 언제든지 되어 있다는 것이다(박 전열, 2010, p. 170). 이러한 모에는 단순히 파편화된 유형과 속성의 의미로서 뿐 아니라, 미완성의 안쓰러움과 귀여움을 유발한다는 의미로서도 사용된다, 따 라서 이러한 모에의 속성은 오타쿠에게는 ‘그들은 내가 없이는 안 돼’라는 식의 심리를 이끌어내며 경계심을 완화해 허구나 가상의 존재와도 쉽게 감정적 교류 와 소통을 하게끔 하는 기제로 이용되기도 한다. 이와 같은 오타쿠의 집단적 참 여와 모에적 소비는 하츠네 미쿠의 사례에서 매우 뚜렷이 나타나는 현상으로 마지막 장에서 본격적으로 다룰 것이다.
3. 보컬로이드와 참여적 이용자이자 관객인 오타쿠
보컬로이드란 발성을 뜻하는 보컬(vocal)과 ‘~와 닮은’이라는 접미사 ~오이드 (~oid)의 합성어, 혹은 보컬에 인간 형상을 한 로봇을 의미하는 안드로이드 (android)가 더해진 단어로 일본의 야마하와 크립톤 퓨쳐 미디어사가 개발한 음성 합성 엔진이자 가상악기를 의미한다. 음성 합성 엔진이란, 기계음 목소리나 자동 응답 시스템(ARS)처럼 인간의 음성을 저장하여 문장이나 단어의 형태로 조합하는 기술을 이른다. 이러한 기술을 기반으로 야마하는 2003년 성우가 없이 프로그램이 노래를 부르게 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인 보컬로이드를 개발하여 출시하게 된다. 오늘날 잘 알려진 보컬로이드는 이러한 소프트웨어에 캐릭터의 외형이 합쳐진 형태이나, 초창기의 보컬로이드는 단순히 레온(Leon)과 로라(Lola)라는 남성과 여성의 목소리에 이름만 붙여진 형태로 실질적인 캐릭터 설정이 부여되지는 않았 다. 이후 메이코(Meiko)와 카이토(Kaito)는 이미지 캐릭터가 부착된 형태로 공개되 었고, 이는 곧 레온과 로라의 실적 부진을 쇄신하는 발걸음이 되었다. 이때, 여성의 목소리와 캐릭터로 등장한 메이코의 인기는 카이토에 비해 현저히 높았고,(임찬수, 임윤지, 2012, p. 4) 이러한 흐름에 따라, 2007년 2세대 여성 캐릭터성을 가진 보컬로이드인 하츠네 미쿠가 발매되었다. 하츠네 미쿠가 흥행한 것을 기점으로 보컬로이드는 소프트웨어 기술을 칭하는 의미와, 이를 통해 생산된 창작물, 그 캐릭터를 포괄하는 의미로 통용되며 일본 서브컬처의 핵심적인 장르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처럼 캐릭터와 컴퓨터 소프트웨어가 합쳐진 보컬로이드의 본질적 특성은 앞서 설명했듯 기계나 사물을 통해 허구나 가상의 존재와 소통하고자 하는 오타 쿠의 특성과 깊이 연결된다. 그러나 레온과 로라가 이후의 보컬로이드와 마찬가 지로 소프트웨어를 통해 인간의 목소리를 낼 수 있었음에도 호응을 얻지 못한 것은 단순히 캐릭터의 부재가 흥미를 불러일으키지 못한 것과 더불어 이용자들 로 하여금 가상의 존재를 만들어 나가며 소통한다는 참여적 경험을 제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즉, 메이코와 카이토를 시작으로 부여된 이미지 캐릭터는 기초 적인 설정일지라도 가상의 존재와 상호작용하는 경험을 주었고, 이용자들에게 음악을 만드는 것 이상으로 그 캐릭터의 목소리를 조정하며 노래 부르게 할 수 있다는 행위성을 부여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캐릭터의 기초적인 설정만을 제공 한 것이 오히려 이용자들에게 그 캐릭터의 성격이나 서사, 세계관 등을 생성하도 록 하며 더욱 더 활발한 창작과 참여를 일으켰다. 이러한 보컬로이드의 특성은 오타쿠의 핵심을 이루는 2차 창작의 참여적 성격과 공명하고 있었기에 서브컬처 의 중핵으로 위치지어지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나아가 애니메이션이나 만화, 게임과 같은 타 서브컬처 장르에서의 2차 창작은 제작사가 1차로 작품의 세계관과 그 속의 캐릭터의 성격, 그리고 그 특정한 캐릭 터를 중심으로 한 서사를 창작하면 이와 같은 원본을 바탕으로 오타쿠들이 그 이후의 이야기나 뒷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따라서 2차 창작에 서 등장하는 전반적인 세계관이나 캐릭터의 설정은 1차 창작물에 고정되어 크게 벗어날 수 없었던 반면 보컬로이드 문화에서는 원본이 부재하기에 1차 창작과 2차 창작을 명확히 구분 지을 수 없는 특성을 지닌다. 즉, 보컬로이드 캐릭터의 기본적인 외형과 목소리 이외의 모든 설정이나 서사가 오타쿠 이용자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으로, 그들의 참여에 의해 생성된 설정을 기반으로 2차 창작이 이 루어지고 또 1차와 2차 창작이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설정들이 축적되기 때문 에 그 경계가 모호한 것이다. 따라서 이 구조 안에서 보컬로이드 오타쿠들은 생산 자이자 소비자인 프로슈머(prosumer)로서 다른 장르의 오타쿠들의 활동보다도 더욱 두드러지게 농도 짙은 참여를 통해 콘텐츠를 완성시키는 필수불가결한 존 재들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참여를 통해 하츠네 미쿠의 사례에서는 가상 아이돌이라는 페르소나를 만들어 하츠네 미쿠를 무대 위의 퍼포머로 존재하게끔 기여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더욱 자세히 설명하도록 하겠다.
Ⅳ. 하츠네 미쿠가 제공하는 관객 경험
1. 보컬로이드 가상 아이돌 하츠네 미쿠
하츠네 미쿠는 보컬로이드2(2007)의 캐릭터이자 그 소프트웨어 프로그램 자 체를 의미한다. 다른 가상악기 프로그램이 악기의 소리를 녹음하여 그것을 소스 로 음악을 만들게 한다면, 하츠네 미쿠는 성우 후지타 사키(藤田咲)의 목소리를 채용하여 데이터베이스화한 것이다. 따라서 하츠네 미쿠라는 보컬로이드 프로그 램을 이용하여 미디를 입력하면, 실제 가수가 부재한 채로 인간의 목소리가 노래 를 하는 음악을 제작할 수 있다. 하츠네 미쿠는 이와 같은 음성합성엔진에, 나이 16세, 신장 158cm, 체중 42kg이라는 디테일한 프로필이 더해진 소녀 캐릭터이기 도 하다. 하츠네 미쿠가 타 보컬로이드와 마찬가지로 처음부터 콘서트의 퍼포머 로서 등장한 것은 아니었는데, 이가 퍼포머로서 등장할 수 있는 영향력을 가지게 한 것은 그 이용자의 역할이 컸다.
2014년 야마하에서는 보컬로이드 어플과 연동할 수 있는 웹서비스를 시작하 여 음악 프로그램을 잘 다루지 못하는 초보자라도 가사만 입력하면 음악이 자동 으로 완성되는 자동 작곡 프로그램 서비스를 출시하였다. 작곡에 관심이 있지만 자본이 부족해 가수를 섭외하지 못하는 아마추어 작곡가들도 이 서비스를 이용 하면 손쉬운 방식의 음성 합성을 통해 노래하는 음악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이 다. 이렇게 창작된 작업물들은 동영상 사이트인 니코니코 동화(ニコニコ動画)에 업로드되고, 여기서 창작자들의 커뮤니티가 형성되며 보컬로이드 문화 확산이 본격화되었다. 이 사이트에 게재되는 음악 작업물들은 상업성을 목적으로 한 것 이 아니라, 취향의 공유를 목적으로 하여 보컬로이드 이용자들의 자유롭고 자발 적인 창작이 가능하였다. 이 아마추어 작곡가들의 노래 중 많은 호응을 얻은 곡 은 소니에서 정식으로 앨범을 발매해 주었고, 이 노래들을 바탕으로 다른 사용자 들이 뮤직비디오를 만들거나 팬 아트를 그리는 등의 2차 창작이 이루어졌기 때 문에, 하츠네 미쿠의 존재는 이용자들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2차 창작이 이루어질 때, 이용자들은 하츠네 미쿠의 공식 설정 에 나아가 성격이나 스토리를 부여하였다. 공식 설정은 미쿠의 외형을 그린 캐릭 터와 나이, 신장, 체중을 명시한 프로필이었지만, 이용자들은 이를 변형하거나 또 다른 설정을 만들어내는 등 하츠네 미쿠에 새로운 페르소나를 부여해 나갔다. 그들은 자신이 보고자 하는 하츠네 미쿠의 모습이나, 자신의 감정이나 이야기를 투사한 하츠네 미쿠를 창작해 왔고, 이는 다양한 이용자들이 자신만의 하츠네 미쿠를 만들도록 했다. 전형적으로 알려진 하츠네 미쿠 뿐 아니라, 하츠네 미쿠의 작은 버전인 하츄네 미쿠, 하츠네 미쿠의 인기를 시기하는 아키타 네루나 다크한 이미지가 강조되는 요와네 하쿠처럼 또 다른 모에 요소들을 취사 선택하고 조합 하여 다양한 파생 캐릭터가 생성되었다. 이처럼 하츠네 미쿠의 정체성은 하나로 수렴될 수는 없으나, 어느 정도 일반적인 틀을 공유하기도 하였다. 그것은 하츠네 미쿠가 버추얼 아이돌이라는 설정이었는데, 이는 하츠네 미쿠가 캐릭터라는 가 상의 존재임과 동시에 보컬로이드이기에 목소리를 통해 노래를 하는 가수라는 점으로부터 기인하였다. 이러한 페르소나는 하츠네 미쿠가 소프트웨어를 넘어 공연장에서 실제로 공연을 하는 가상 아이돌 퍼포머로서 존재하도록 하였다.
2. 하츠네 미쿠가 제공하는 관객 경험
이러한 가상 아이돌 퍼포머가 물리적 공간에 등장할 때, 관객들에게 현전 경험 을 제공할 수 있는가? 현전은 앞선 선행연구에서 살펴 보았다 싶이, 신체나 행위 의 본질적 속성이라기보다 관객과의 관계성 내에서 질적으로 경험되는 것이 강 조되는 개념이다. 따라서 하츠네 미쿠가 퍼포먼스에서 제공하는 현전 경험을 파 악하기 위해서는 관객이 그 퍼포먼스 내에서 퍼포머, 그리고 그 관람을 구성하는 요소들과 어떠한 관계성을 맺었는지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케이와 지아나치의 논의를 통해 가상의 퍼포머가 현전 경험을 주는 것은 실제 세계를 사실적으로 묘사할 때가 아니라, 만화적인 연출이나 퍼포머가 스스로 가상임을 드러내는 등, 가상성을 드러낼 때임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전형적인 서브컬처 미소 녀 캐릭터의 외형을 하고 있는 하츠네 미쿠가 만화적인 외형을 통해 가상성을 띄고 있다는 것은 이미 알 수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만화적 외형을 가진 모든 가상 캐릭터의 등장이 현전 경험을 발생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기에 이가 관객과 상호작용하며 정동적 반응을 일으키는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2007년 하츠네 미쿠가 발매된 지 한 달이 안 된 시점에서 니코 니코 동화 웹사이트에는 <미쿠 미쿠 하게 해줄게♪>(みくみくにしてあげる♪)라는 곡과 그 퍼포먼스가 담긴 영상이 업로드 된 바 있다. 가사의 내용은 자신을 패키지에 서 꺼내 설치하고 이용해 노래하게 해달라는 것으로, 재생 수 1위를 달성하며 하츠네 미쿠 신드롬을 일으킨 곡이다. 이 곡이 신드롬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은 하츠네 미쿠가 스스로 가상의 존재라는 것을 자기지시적으로 고백하며 그 가상 성을 드러냄으로써 관객들에게 역으로 살아 있는 존재라는 느낌을 주었기 때문 이다. 하츠네 미쿠의 관객인 오타쿠들은 가상과 허구의 존재에 친숙하기도 하지 만, 하츠네 미쿠의 자기지시적 태도에서 드러난 미완의 존재로서 모에의 전략이 오타쿠에게 귀여움과 동정심이라는 감정 즉, 현실적이고 감각적인 반응을 불러 일으켰기에 가상 퍼포머와의 깊은 관계성 형성이 가능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주어진 프로필 이외에 모든 것이 여백으로 남아 있는 하츠네 미쿠의 특성은 오타 쿠들로 하여금 하나의 하츠네 미쿠가 아닌 수많은 자신만의 하츠네 미쿠를 양산 하게 하였다. 즉, 이러한 개개인의 상상을 투사할 수 있는 여백을 가진 존재라는 특성 자체가 오타쿠 관객에게 모에함을 유발하며 이 가상 퍼포머와의 상호작용 과 유대 관계를 쉬이 만들어 낼 수 있게 한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관객과의 관계성의 형성이 하츠네 미쿠의 현전감을 발생시키는 데 일조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하츠네 미쿠에게 모에함을 불러일으키는 서사와 퍼포먼스를 부여한 것이 관객인 오타쿠들 스스로라는 점에서, 일반적인 가상 퍼포머가 제공하는 관 객 경험과는 차별화된다. 앞서 거듭 논의했듯 오타쿠에게 향유란 단순히 수용만 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그들에게 관람 역시 단순히 무대를 바라보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관람은, 응시하는 순간의 행위만이 아니라 그 사전 지식을 생성하는 과정과 응시 이후에 재생산을 통해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까지를 아우르는 확장된 실천이다. 그리고 이를 리터 식으로 말하면 ‘확장된 관객 참여’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서브컬처 장르에서 오타쿠들이 1차 창작물로부 터 모에한 속성들을 발견하며 이를 소비하는 방식에 2차 창작을 포함시키는 것이 일반적이었다면, 보컬로이드인 하츠네 미쿠의 사례에서 오타쿠는 모에의 소비자 이기 이전에 생산자이다. 즉, 하츠네 미쿠의 관객인 보컬로이드 오타쿠들은 1차 창작물을 덧붙여 재현하는 2차 창작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자신들이 소비할 하 츠네 미쿠의 모에한 서사와 정체성을 직접 창조함으로써 1차 창작에도 기여한다.
그러나 창작자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창작한 퍼포머가 등장할 때, 자신이 창작 했기에 오히려 그것이 허구와 가상이라는 사실을 강력히 인식할 수도 있다. 더불 어 자신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서사와 퍼포먼스의 조작에 동참하는 실재의 오타 쿠 커뮤니티 일원들이 공동 현존할 때 이러한 인식은 더욱 강화될 수 있는 것이 다. 마치 분라쿠에서 인형을 조종자의 얼굴이 노출되어 있어 시선이 일정 부분 그 쪽으로 빼앗기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론 젠킨스(Ron Jenkins)는 “우리는 인형 조종자를 보면서도, 인형이 환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기꺼이 그 환영에 속아 넘어간다. 분라쿠는 우리에게 믿지 말라고 도전하지만, 우리는 거절한다. 우리는 현실이 아님을 뻔히 알면서도, 그 비현실성에 집착한다”고 말한다. (Ron Jenkins, 1983, p. 415) 즉, 조종자라는 실재와 인형의 병치는 그 인형이 만들어내 는 것이 명백한 환영임을 관객들에게 인지시키는 장치임에도 관객들은 그것에 더욱 몰입하고자 한다. 이는 케이와 지아나치가 퍼포먼스의 맥락에서는 환영성 의 감각이 현전을 생성하는 동력이 되기에, 명백히 가상적인 행위와 몸이 오히려 강력한 현전의 경험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주장했던 것과 상통한다. 따라서 하츠네 미쿠의 사례에서 또한 창작자이자 관객인 오타쿠들이 하츠네 미쿠가 가 상의 존재임을 인식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그렇기에 오히려 이에 더욱 능동적이고 강력하게 몰입하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몰입은 개인 차원에서도 일어나지만, 집단 차원에서도 발생한다. 1차 창작되고 그것을 바탕으로 2차 창작되며 구축된 하츠네 미쿠의 서사와 정체성은 개인적 상상 차원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오타쿠 커뮤니티 집단의 차원에서 공유되고 발전된다. 관객들은 커뮤니티 안에서 서로의 창작물에 대한 공유와 토 론을 통해 하나의 장을 만들며 활동한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서 오타쿠 관객들 은 하츠네 미쿠와의 관계성 뿐만 아니라 같은 오타쿠 관객들과의 관계성을 형성 하게 된다. 커뮤니티 내의 인정과 감정적 소속감은 가상 퍼포머인 하츠네 미쿠에 대한 더 큰 몰입과 참여를 불러일으키는 순환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이는 신화가 전래되는 방식과 유사하다. 신화가 구전되고 필사되며 전승되는 방식처럼 하츠 네 미쿠의 서사와 정체성 역시 오타쿠들에 의해 복제되고 변형되며 끊임없이 재구성 된다. 그렇게 생성된 각각의 하츠네 미쿠들은 상호 참조되는 의미망이 되고 그 공동체 전체가 공유하는 신화를 이루게 된다. 이러한 신화는 가상의 존 재를 구성함과 동시에 공동체를 결속시키는 힘을 가진다. 따라서 그 공동체가 모인 콘서트 에서 하츠네 미쿠를 관람하는 경험은 자신들이 만들어낸 하츠네 미쿠라는 가상의 신화를 실재의 공간에서 마주하는 경험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 한 신화를 실재의 공간에서 마주하는 순간, 관객들에게 정동이 발생되는 것은 필연적인 일이다. 더불어 이와 같은 정동은 가상 퍼포머인 하츠네 미쿠를 더욱 강력한 현전하게 한다. 따라서, 하츠네 미쿠는 오타쿠 관객의 개인적인 자기-몰 두 뿐 아니라 네트워크적 상호작용과 공동체성을 발생시키고 하츠네 미쿠가 질 적으로 생생하게 경험되게 하는 데에는 관객들 간의 상호작용이 핵심이 되었다 는 것을 알 수 있다.
Ⅴ. 결론
본 연구는 가상 퍼포머 하츠네 미쿠(初音ミク)를 중심으로 기술과 접속한 동 시대 퍼포먼스가 관객에게 제공하는 관객 경험을 분석하였다. 하츠네 미쿠 는 실재하는 인간 퍼포머 없이도 무대에 등장하는 보컬로이드이자 버추얼 아이돌 로, 그 존재는 이용자의 참여를 통해 비로소 성립되는 특성을 가졌다. 본고는 하츠네 미쿠의 공연이 타 가상 퍼포머들과는 다른 새로운 관람 방식을 형성한다 고 보았다. 이를 위해 본 연구에서는 퍼포먼스 연구의 맥락에서 현전과 관객성 담론에 대해 조사하였고, 일본 서브컬처의 맥락에서 보컬로이드이자 가상 퍼포 머인 하츠네 미쿠의 주요한 관객층인 오타쿠가 가지는 특성과 그 중에서도 보컬 로이드 문화에서의 오타쿠 이용자-관객의 특이성에 대해 검토하며 하츠네 미쿠 의 퍼포먼스가 관객의 정동을 이끌어내는 방식에 주목하였다.
하츠네 미쿠가 제공하는 관객 경험을 분석한 결과, 하츠네 미쿠는 가상성을 드러내며 오히려 관객에게 현전 경험을 발생시키고 미완의 존재라는 설정, 자기 지시적인 태도를 통해 모에한 정동을 일으켜 오타쿠 관객과 관계성을 형성한다. 또한 ‘확장된 관객 참여’를 통해 1차, 2차 창작에 모두 참여하는 관객이자 창작자 인 오타쿠가 생산한 하츠네 미쿠의 서사와 정체성은 커뮤니티 차원에서 공유, 재구성되며, 이는 공동체적 소속감과 몰입을 강화함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공동체의 가상의 신화처럼 구축된 하츠네 미쿠를 실재의 공간에서 마주 하는 순간 강한 정동과 현전 경험이 발생되는 것은 필연적이라고 보았다. 따라 서, 하츠네 미쿠는 오타쿠 관객의 개인적인 자기-몰두 뿐 아니라 네트워크적 상 호작용과 공동체성을 생성하고, 하츠네 미쿠가 현전 경험을 만들어내는 데에는 관객들 간의 상호작용이 핵심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론적으로, 하츠네 미쿠의 관객 경험은 단순히 가상 퍼포머의 현전을 재고하 는 것뿐만 아니라, 퍼포머와 관객 사이의 관계 자체를 새롭게 사유하게끔 하였 다. 관객은 더 이상 수동적인 응시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퍼포머의 존재와 현 전을 직접적으로 구성하는 적극적인 생산자에 위치에 있다는 것을 사례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본 연구에서 다룬 하츠네 미쿠는 무대 위의 퍼포머로 서 오직 관객의 참여를 통해서만 가시화되기 때문에 취약한 위치에 놓이기도 한다. 하지만 동시에 하츠네 미쿠는 관객들에게 정동을 생성하고 현전 경험을 제공하며, 본 연구와 같은 다양한 물질-담론적 현상을 촉발하기에 매우 강력한 행위성을 가지는 개체이다. 본 연구에서는 관객과 퍼포머의 역동 안에서 관객의 역할과 참여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해 왔기 때문에 이러한 측면에 두드러 지게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중요한 것은 관객 참여가 단순히 퍼포머와 관객의 위계를 전복하거나 새로운 위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 둘 관계의 얽 힘을 드러낸다는 점이다. 마치 하츠네 미쿠의 존재가 오타쿠 커뮤니티를 집결시키고 오타쿠 커뮤니티는 하츠네 미쿠를 무대 위로 올려 퍼포머라는 존재로서 가시화 시키는 것처럼 말이다. 후속 연구에서는 이러한 얽힘 속에서 퍼포머의 역할에 집중하여 가상 퍼포머가 가지는 행위성이나 물질성에 대한 탐구가 더 필요할 것이다.


Korea National University of Arts





